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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生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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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生家)’
  • 청양신문
  • 승인 2000.06.05 00:00
  • 호수 36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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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승 원
태어나 자란 집이 허물어져 가고 있다.
기왓장은 깨져 물이 새고 담벽은 헐어 뼈만 앙상해 졌으며 사랑방 문 창살은 부서져 너덜거리고 있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고향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고향을 찾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으니, 1년에 한 두 차례 성묘 차 들리는 게 고작이다.
생가에는 사촌이 잠시동안 살다가 새 집을 지어 나간 뒤로 관리자가 없으니 폐가로 변하고 있다. 전세금이나 월세금이 필요 없는 집이므로, 지금은 인근 학교 교직원이 임시거처로 삼고 있으나 돈을 들여 고쳐야 하는 데는 일체 손을 대지 못한다.
겨울을 나기 위해 방풍용 널빤지를 대고 마구 못질을 해댄 기둥은 위태롭기만 하고, 개조한 부엌이며, 뼈대만 남은 외양간, 잿간, 곳간 등의 일부는 원형조차 상실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어디 그 뿐인가.
사랑채 벽에 매달아 놓은 멍석이며, 삼태기, 망태기, 메꾸리 등 늙으신 부모님이 생전에 지문이 닳도록 애써 만들어 놓은 농기구는 도회지 어느 향토 음식점 구석에 골동품으로 모셔져 있는지 모를 일이다.
생가의 실질적인 주인인 장형은 지난 96년 정년퇴임을 앞두고 고향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가족 수련원’이란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흉물스럽게 변해 가는 생가를 복원해서 흩어져 사는 친동기간끼리 모여 정도 나누고, 커나는 자손들의 산 교육장으로도 활용해보자는 뜻에서 정년퇴직 후의 청사진을 밝힌 글이다.
고향을 그리며 타향살이 하는 우리형제들은 장형의 이 같은‘고향집 복원 청사진’을 보면서 가슴 뭉클한 바가 있다.
특히 이런 대목에 가서는 큰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기까지 하였다.
‘수련원의 위치는 고향에 남아있는 빈집이다.
60여년된 목조 기와집 안채는 잘 수리해서 보존 활용하고, 사랑채는 퇴락하여 도저히 지탱할 수 없게 되었으니 허물어 바깥마당과 합쳐서 주차공간으로 만들어야 겠다.
뒤켠 텃밭에는 살림집 겸 수련원을 작지만 쓸모에 맞추어 지을 작정이다.
상주는 못하지만 숙식과 생활에는 불편이 없도록 하고 옛날과 같이 울타리도 다시 만들고 싶다.
수련은 수강생인 자손들이 주말이나 휴가기간을 이용하여 3박4일 정도가 적당하리라.’
그런데 지난여름 휴가 중에 형님과 함께 원거리 여행을 하면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고향의 인근지역으로 발령 나 경지정리작업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장조카가 이번 기회에 생가를 정리해 보겠다고 제안하더라는 것이다.
‘정리’의 구체적인 시행방법은 생가를 헐어버리고 농지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물론 장조카도 이젠 지명에 이르렀고, 아버지 형제들의 고향에 대한 향수와 생가에 대한 미련 등 정서를 모르지 않는 까닭에 아주 조심스럽게 개진했을 터이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가족 중 어느 누구도 빈집을 관리할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대로 방치하여 흉가로 만드느니 차라리 농지로 전환하는 게 현실적이라는 논리이다.
또 하나는 큰 형수님이 옛시가에 대한 인상이 그리 좋지 않다는 점도 크게 작용한 듯 하다.
그 옛날 지긋지긋했던 가난과 고생스러웠던 시집살이 기억이 되살아나는 고향집을 이제 와서 돈을 들여 영원히 보존할 필요가 있느냐면서, 반대 입장이라는 것이었다.
큰 형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 구상이 아무리 그럴 듯 해도 가족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다.
어느 듯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도 있고, 이제는 내 의지력만으로는 안되기 때문에 아내와 자식들의 의견도 존중하고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이다.”
나는 형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종일관 침묵했다.
의사 표시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이 내게 이런 뜻을 밝히는 걸 보면, 형님도 이젠 시골집에 대한 미련을 어느 정도 떨쳐버린 상태라는 느낌을 강렬히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의 마음을 굳힌 단계에서 동생의 의견은 하나의 참고사항일 뿐이지 적극 반영 또는 관철해 본다는 뜻은 아니라 여겨졌던 것이다.
그리고 생가에 대한 일체의 권리는 장조카에게 있으니 삼촌은 제삼자가 아닌가.
설령 남에게 당장 매도해 버린다 해도 마음만 안타까울 뿐이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위치에 있지 아니하다.
그런데 여행을 끝내고 귀가하는 도중에 형님은 또다시 생가에 대한 농지전용 문제를 거론하면서 동생의 의견을 물었다.
“형님이 하시는 일에 동생이 간여할 바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형님이 그 동안 구상하셨던 ‘생가 복원 청사진’이 왜 아직까지 진척이 없나 궁금했는데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형님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려는 게 아니라, 형님의 퇴직 후 구상이 지상에 공개된 뒤 지역인사들까지 부러워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가족수련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자는 뜻에서 나는 말을 이었다.
“장조카의 판단이 현명한 지 모릅니다. 그러나 ‘생가’가 흔적조차 없어질 것을 생각하니, 자꾸만 걸리는군요. 부모님의 피땀과 혼이 서려있는 보금자리이고, 우리 형제들의 꿈과 애환이 살아 숨쉬는 곳인데...”
형님도 그 대목에 가서는 “맞다. 그래 그 말이 맞다”고 공감을 표시하면서, 고향집에 대한 정서는 우리 형제가 다 마찬가지라고 동생을 위로했다.
그러면서 아직은 확정적인 것은 아니니 좀 더 두고 생각해 보자며 여운을 남겼다.
나는 문득 김문수의 단편 ‘만취당기’가 떠올랐다.
‘만취당’이라는 고가를 통해서 한 집안 3대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특히 그 집에서 3정승이 태어난다는 해학적인 구도가 흥미로우면서도 심각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을 예로 들면서 무엇보다 우리의 전통적 촌락이 시대적인 변화와 함께 붕괴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형님께 말씀드렸다.
이 세상에는 본인 사후에 생가에 후손들이 문화유산처럼 소중히 관리하는 것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얼마 전에는 월북 시인 생가를 찾은 적이 있다.
일부 반공단체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빛낸 사람이라 하여 시인의 생가를 관에서 잘 복원하여 경향각지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있었다.
만약 그 자리에 누군가가 고층 건물을 세웠거나 효용가치를 따져 상가로 전용해 버렸다면, 당시 시인이 살던 초가를 그처럼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었을까?
이름을 떨친 작가나 저명 인사가 아니라도 그렇다.
범인으로서도 생가의 의미는 모태나 다름없다.
더구나 어려웠던 농촌시절을 아픈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도회인의 심정은 남다르다.
가을이 되면 안마당에는 1년 농사를 거둬들인 통가리가 세워졌고 바깥마당은 농한기에 신파극을 공연할 정도로 동네에서 가장 넓은 문화 공간이었다.
외양간에는 형님들의 학자금 밑천이 되었던 황소가 여물과 쇠죽을 먹는 모습이 지금도 선연하다.
삶은 평탄치만은 않은 것이어서, 뜻을 피워 보지 못한 혈육이 젊은 나이에 이승을 떠나는 큰 아픔도 겪었지만, 새 색시를 맞이하는 날 대문간에서는 바가지를 깨뜨리며 박장대소하는 동네 아낙들의 환호와 온가족의 기쁨도 있었다.
불을 때서 밥해 먹던 그 시절, 새카맣게 그을린 부엌문에는 누나에게 응석부림을 하면서 못으로 긁어 놓은 막내의 낙서 ‘밥 빨리 줘~잉’이라는 글자가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는 정겨운 곳.
손자에게 줄 눈깔사탕이 언제고 뒤져보면 하나쯤 나오는 어머니의 ‘비밀 창고’ 벽장 속에는 아직도 실꾸리가 담긴 반짇고리가 그대로 들어 있고, ‘진품명품’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어머니의 혼수감 1호 오동나무 장롱이 아직도 골방에 그대로 모셔져 있는 우리의 옛 집.
대대손손 가난을 벗지 못하던 재래식 농경지와 빈 농가를 갈아 업고 생산적인 현대식 개량농지로 바꾸는 농촌진흥사업이 지금 충청도의 최오지인 나의 고향에서는 한창 벌어지고 있다.
우리 형제들의 모태이자, 부모님의 영혼이 사라 숨쉬는 생가를 헐어버리고 곧 농지로 전환할 모양이다.
객지의 삼촌이 무슨 권한으로 이를 말릴까?
시대의 변화에 순응하는 수 밖에...

■ 필자소개
○장평 중추리 출생
○1990년 ‘한국문학’ 지령 200호 기념 지상백일장 장원 당선
○1991년 KBS와 ‘한국수필’ 공동 공모 수필 당선으로 등단
○저서; 수필집 ‘삶을 가슴으로 느끼며’‘덕담만 하고 살 수 있다면’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현재, 대전북부경찰서 정보과 재직(연락처 019-422-7861)

‘에필로그’
그 후 안타깝게도 생가는 헐리었고, 장조카는 “생가 자리는 지대가 낮아 집터로서는 부적합하다”며 생가 터 대신 선산 주변의 마땅한 대지를 물색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태어나 자란 그 자리가 아니어서 서운하긴 하지만, 인근 지역에 또 다른 터를 마련 중이라는 조카의 소식에 나는 고무되어, 고마운 마음으로 앞으로 복원될 생가에 대한 큰 기대감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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