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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이어가는 ‘어진 마을’ 들판엔 풍요로움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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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이어가는 ‘어진 마을’ 들판엔 풍요로움 가득
  • 김홍영 기자
  • 승인 2008.08.11 17:56
  • 호수 76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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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의 자연마을과 주민숙원사업: 청남면 인양리
▲ 멜론 하우스를 찾은 윤경학 이장(사진 뒤쪽)과 주민 한근수씨.
▲ 용산고개에 자리한 해인정 앞으로 전승환 한학자와 한영석 선생의 추모비가 있다.

“점심 먹고, 나무 그늘 아래로 오세요. 그 시간이면 주민들 많이 나옵니다.”
청남면 인양리 윤경학(67) 이장이 일러준 시간에 찾아가니 서편마을 정자나무 아래 꽤 많은 주민들이 둘러앉아 있다.
“여름에는 이곳이 최고지요. 시원하니 이만한 데가 어딨어. 나오라 안 해도 여기 다 나와요.”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구수한 음식 냄새가 난다. 한 주민이 어죽을 끓여 왔다. 한 국자씩 떠서 나누니 큰 솥이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이렇게 모이면 입이 심심해지잖아요. 가끔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어요. 한 여름의 어죽은 이열치열로 최곱니다.”
주민들이 맛나게 어죽을 먹는다. 함께 나누어 먹으니 더 맛있다는 표정이다.
주민들은 인양리가 예부터 서로의 사정을 살피고, 어른들 공경하는 마음이 깊다며 이 마을에 살았던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인양리는 금강변에 자리하고 있어 아주 오래전에는 ‘해대’라고 불렀다. ‘인양(仁良)’이란 지명으로 바뀐 것은 조선 정조 때였다.
“이 마을에 살던 한씨 부자의 효심이 지극하였는데 이를 알게 된 왕이 마을 이름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 마을 출신의 인물에 대한 주민들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주민들 어려울 때 벼 서말씩을 나눠줬다는 한영석씨, 서당을 열어 마을 뿐 아니라 인근의 주민들까지 가르쳤다는 전승환 한학자, 적산 토지가 농민의 땅이 될 수 있도록 힘쓴 윤창의씨, 9.28수복 때 청남면 치안대장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윤영창 선생이 모두 인양리 사람이다. 이들을 기리는 공덕비가 마을 곳곳에 세워져 있어 행적을 잘 살필 수 있다.

지금도 웃어른 위하는 효자·효부가 많다며 마을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한다는 주민들은 인양리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해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훌륭한 어르신들이 많았으니 선조들의 뜻을 이어받아 마을 사람들 서로 화합하며 이웃의 본이 되게 살아야지요.”

청남서 하우스 규모 제일 큰 마을
인양리는 청남에서 하우스 농사 규모가 가장 많은 큰 마을로 꼽힌다. 하우스 동수만 해도 250여 동이나 되고 전체 가구 100여 가구 중 30퍼센트가 하우스 농사를 짓는다.
“땅이 점질토라 물이 잘 빠지고, 하우스 하기에 좋습니다.”
하지만 50여 전만 해도 인양리의 살림살이는 현재를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곤궁했다.

“마을 이름이 왜 해대였겠어요. 금강이 가까워서 비가 많이 올 때에는 여기 마을회관까지 물이 들어와 바다 같이 되었다니까요.”
강가의 밭에서 보리농사를 짓거나, 논이 없어 아산리까지 가서 벼농사를 지었다.
“금강 제방공사하고 땅 개간하면서 농사다운 농사를 짓게 됐지요.”
현재 180여 명 정도 살고 있는 인양리는 인근에선 인구가 많은 편에 속하지만 가장 주민수가 많았던 때가 제방을 쌓았던 시기였다. 150가구에 1000여 명이 살았다.

“땅이 생기니까 농사지으려고 사람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어요. 한 집에 일곱 여덟 정도 살았고, 여남은 명 되는 집도 있었어요.”
사람들이 모여들어 주민들은 셋방도 주고, 당시 정부에서 주택까지 지을 정도로 주민이 많았다고 한다.
“땅이 있으니 열심히 일만 하면 살만했죠. 그 때 주민들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주민들 서로의 손과 손이 모아져 넓은 들 모를 모두 심었다. 비료가 없을 때는 퇴비를 많이 쌓아 상을 받았다 하니 인양리 사람들의 근면성과 성실함을 짐작할 만하다.

1980년대 들어서 인양리에 하우스 농사를 짓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인접한 부여에서 먼저 시작된 하우스 농사의 영향으로 마을의 한 주민이 수박을 시작으로 하우스 농사를 시작했다.
“우리 마을은 청남서 제일 일찍 하우스를 시작한 마을로 처음에는 수박 농가가 60여 가구 정도 됐어요.”
하우스 농사짓기 전에는 겨울이면 동네 마을회관에 모여 소일거리 찾으며 지내는 것이 일이었는데, 하우스 농사지으면서는 일년 내내 바쁘게 지낸다는 것이 하우스 농사를 시작하면서 달라진 마을의 모습이다.
윤 이장과 주민 한근수씨(71)와 하우스로 향했다. 5월 중순부터 6월말까지 수박을 수확한 하우스에서는 멜론과 고추가 잘 영글어가고 있었다. 여기에 토마토까지 일년 내내 하우스에서는 주민들 땀방울의 결실이 맺어지고 있다.

다시 윤 이장을 따라 해인정을 올라가니 제일 먼저 푸르른 소나무가 반긴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소나무를 친구삼아 서 있는 해인정은 그림의 한 장면처럼 색다른 풍광을 자아낸다. 주민과 출향인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전통 정자 양식으로 지은 것이 해인정. 인양리의 원래 이름인 해대의 해자와 인양리의 인자를 합해서 해인정이라 정했다.
“혼탁한 물도 다 받아들여 순식간에 바다물이 되듯 어진 사람이 되어 이웃에 이바지하라는 뜻을 담고 있어요.”
해인정이 서 있는 용산고개는 예로부터 시원하고 경치 좋기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여기 서면 마을 앞 들판이 한눈에 들어와요.”
나무 가지 사이사이로 초록의 들판과 하얀 비닐하우스가 함께한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넉넉한 들을 바라보는 주민들을 보니 인양리의 전통과 인심은 아직도 시대를 이어 계속되고 있음이 느껴진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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