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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애국단 충청남도단장 유환방 삼부자의 애국충정에 삼가 머리를 숙여 존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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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애국단 충청남도단장 유환방 삼부자의 애국충정에 삼가 머리를 숙여 존경하
  • 청양신문
  • 승인 2001.03.26 00:00
  • 호수 4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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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애국단 충청남도단장 유환방 삼부자의 애국충정에 삼가 머리를 숙여 존경하자”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충청남도 단장 유환방 / 청양군 단장 유경재 기적(紀蹟)

도덕성회복 범국민운동 청양군지부장 이선행

3월달은 일본제국주의의 학정과 질곡속에 국운은 기울어 막다른 갈림길에서 ‘을미 국모시해사건`이란 전 세계인이 경악을 금치못한 사건후,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같이 어려울때에 겨레의 3.1독립만세의 함성이 노도와같이 전국 방방곡곡에 터져 나올때에 벼슬도 버리고 아들 유경재, 사위 서승열과 함께 “대한독립애국단˝에 가입하고 가업을 정리하여 독립자금으로 바치고, 철원애국단과 같이 충청남도단장으로 활약하며 상해 임시정부지원단연통부역할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옥고 끝에 조국해방을 눈앞에 두고 영면한 애국지사 유환방 3부자를 추모하면서 다시한번 그 행적을 상기시키고자한다.

대한독립애국단 충청남도 단장 유환방
무안인 유공의 휘는 환방이요 자는 의삼이며 호는 의곡(義谷)이다. 선생은 구한말 서양외세의 숨결도 높던 서기 1861년 철종 계해 12월 3일 청양군 대치면 상갑리에서 유인권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유년부터 천품이 청백강직하여 영매한 재질과 강인한 의지를 지녔으며 오직 “의˝ 만을 위하여 살겠다고 다짐하여 스스로 호를 의삼(義三)이라 하였다.
벼슬이 정삼품 동정대부 중추원 의관에 이르렀으나 국운은 기울어 을미 국모시해사건후 겨레의 3.1독립만세함성이 터지자 자신의 아들 유경재와 함께 고향인 청양에서 만세시위를 주도 했으며, 동년 11월 “대한독립애국단˝에 가입한 후 충남지방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동단의 충청남도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5월 서울에서 신현구등이 주도,결성한 대한독립애국단은 본부를 서울에 두고 강원도, 전라도, 등지에 도단을 설치하고 그 중에 강원도단은 이봉하단장의 규모가 가장컸던 “철원애국단˝으로 알려져있으며, 이들은 모두 상해임시정부지원단체였는데, 청양군단은 충청남도단의 산하조직이였다.
동단은 이무렵 서울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대동단˝ “대한독립청년외교단˝ 등의 단체와 교류하면서 결속을 강화했다.
이와같은 대한독립애국단의 주요활동은 임시정부의 선전활동과 재정자금의 조달, 그리고 국내의 조직망을 바탕으로한 상해임시정부의 연통부같은 역할의 수행 등 이였다.
그는 주로 자금조달의 활동을 했는데 1920년 1월 강원도단이 “애국단 강원도단 철원군단˝을 조직하다가 전모가 드러나면서 조직이 발각되자, 김상덕, 강대여, 유환방, 박연서, 정상길, 유경재, 김철회등 사십여명이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일년여동안 고초를 겪다가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 풀려났다.
이때 공판에 회부된 인사의 명단은 이봉하, 이용우, 이정수, 조종대, 신현구, 문봉의, 유경재, 윤홍모, 김동훈, 문명섭등이다.
한 평생을 조국의 자유독립을 위하여 갖은 고초와 혹형의 여독으로 1925년 을축 12월 6일 대치면 상갑리에서 영면하니 그의 나이 향년 64세 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1963년 3월 1일에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많은 공로로 대통령권한대행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표창을, 1990년 12월 26일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우리나라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큰 공로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건국헌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배(配) 숙부인 평산신씨와의 사이에는 경재 일남이 있다. 묘는 대치면 이화리 신점 선영하 간좌이다.

대한독립애국단 청양군단 단장 유경재공의 휘는 경재 자는 윤명 아호 경식이다.
공은 애국지사 유환방의 외아들로 서기 1900년 경자 5월30일 청양군 대치면 상갑리에서 태어났다. 7세에 자작시를 할정도로 그 총명은 뛰어났고 경성보성전문학교 재학중 동접(同接)과 더불어 일인총독을 암살할 목적으로 폭약을 밀조하다 발각되니 “이는 산의 여우를 잡는 약이다˝며 임기응변하여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니 이때, 그 여우는 바로 간악무도한 저 일인총독을 말하는 민족혼의 토로였다.
이같은 항거의 길은 3?1독립운동 당시 부친의 뜻을 받들어 고향인 청양에서 만세를 주도했으며 동년 11월 “대한독립 애국단˝에 가입한후 동단의 “청양 단장˝으로 활약했다.
서울 본부를 왕래하며 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조직확대에도 힘을 쏟아 1919년 12월 자신의 매부인 서승열을 가입시키는등 활발한 활동을 폈다.
그러던 중 1920년 1월 조직이 발각됨으로서 일경에 피강되여 동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복역 1년형을 선도받고 옥고를 치뤘다.
출감 후 부친이 옥중여독으로 돌아가실 때 단지수혈하는 효성을 보이니 이 또한 충과 효가 원래 하나인지라 자신도 무서운 고문의 여독을 못이겨 피로운 신음속에 그대로 여생을 마치게 되니 유씨 명가에 양대 애국지사의 충효고절은 만고에 빛나고 때는 바로 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7월 16일 46세로 영면했다. 무안 유촌인 대치면 이화리 선영하자좌에 지금도 잠들고 계시니 배(配) 함평정씨 사이에 4녀가 있다
정부에서는 1963년 3월 1일 부친과 같이 대통령표창을 그 후 1990년 12월 26일 노태우대통령으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우리는 1945년 세계제2차대전의 종식과 함께 일제의 질곡에서 벗어나 해방된 자유민족이 되었다.
흔히 이것을 세계사의 퇴이에 따른 일제 군국주의의 패망이나 국제정세의 변천 때문에 부수적으로 얻어진 것처럼 오늘날 단순히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지난 반세기에 걸친 우리선열들의 피의 공로가 들어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청양군출신 독립투사들의 항쟁사를 깊이알고 정리하여, 첫째, 선열들의 은혜에 보답하고, 둘째, 자라나는 다음 세대들에게 정확한 기록을 넘겨주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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