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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남 시인의 시집 ‘내 몸의 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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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남 시인의 시집 ‘내 몸의 봄’에 대하여
  • 청양신문
  • 승인 2001.02.04 00:00
  • 호수 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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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함께 탄 자전거 위에서의 짧은 몇개의 단상’
이 종 진(시인. 정산면 해남리)


류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눈에 익히 익었던 것들이, 오늘 갑자기 낯선 것으로, 그리하여 새로운 것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몇 개의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늘 보던 달력이지만, 그 달력 속의 시간들이 지금과, 지금이라고 말하는 순간 지금이 다르게 다가오는 것처럼 그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잘 아는 풀의 이름과 내가 가까이에서 늘 대하던, 대해주던 그의 아내와 그가 오늘 달리 보이는 묘한 밤입니다.
늘 난 나에게만 맞는 안경을 쓰고 있었던 것을 그의 시집을 읽고 난 뒤, 고백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고백하여야만 할 것 같은 밤 입니다. 늘 난 나의 안경의 돗수로만 세상과, 나와 그의 ‘내 몸의 봄’을 피워낸 풀잎들의 흔들림을 보아온 것에 대하여 고백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한가지 더 고백하여야 할 것이 있다면,그와의 술마시기는 늘 나의 패배로, 나의 완패로 끝이 났었다고 부끄런 고백을 그의 시에게 이제서야 고백합니다.


언제였더라. 깨끗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류지남 시인을 내가 처음 본 게 언제였더라.
아마 4~5년 전. 그럴거야. 그가 이미 세상의 문턱을 넘어 한참을 내달려 올 때, 두발 자전거의 안장에 앉아 열심히 폐달을 밟고 좌우 유심히 바라볼새 없이 거침없이 달리고 있을 때, 난 그를 처음으로 아주 멀리서 쳐다 보았다.
그리고 그후 아마 1,2년 뒤 내 앞에서 누군가 브레이크를 잡고 안장에서 내려 손등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을 때, 그 자전거 주인이 류지남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난 그의 자전거가 탐이 났다. 그렇다고 그의 자전거를 내 것으로 만들기에는 이미 난 그에게 나를 들키고 말았다. 이미 절도할 수 없는 자전거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그의 그 빛나는 자전거를 포기 할 수는 없는 자전거가 되어 있었다. 아, 그렇다면 가장 좋은 것은 그의 자전거를 가끔 빌려 탈수 밖에는.
이렇게 나의 술책에 말려든 그는 가끔 전화를 하면 자전거를 끌고 나와 같이 타고 가며 술도 마시고 밤도 세웠다. 그는 가끔 전화를 하지 않아도 세차를 말끔히 한 자전거를 번쩍거리며 타고 나와 먼데까지 구경도 시켜주었다. 그와의 만남은 아름다웠다. 그와의 만남이 아름다운 것은 그의 자전거가 있어 멀리서 달려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자전거와 더불어 자전거 타기의 묘기를 하나씩 세상에 노출 시키기 시작하면서 더 그와의 만남이 아름다워지기 시작했다.


그가 공주 시내에서, 아파트에서 4~5십리 외진 시골구석으로 온 것이 2~3년 되는 것 같다. 그의 자전거 짐받이에 세간과 애들과 아내를 몽땅 싣고와 풀밭에 내려 놓고 풀을 뜯기 시작한 것이 벌써 몇해가 지나고 있다. 행여나 풀만 먹고 살다가 영양실조라도 걸리지 않았나하고 가끔 방문을 해보면 난 깜짝깜짝 놀란다. 술김에도 깜짝깜짝 놀란다. 풀만 뜯고 자라는 애들이라고 보기에는, 모두들 두릅순처럼 눈 밝고, 자운영 별밭처럼 반짝반짝거리고 있었다. 그가 묘기를 부리듯 다루는 자전거 바퀴살처럼 더 쌩쌩해져 있었다. 그러면서 그가 이주민의 대표로써, 풀의나라 대표로써 한마디 하는데, 풀의 나라로/ 다시 돌아와 맞은/ 첫 봄// 냉이, 머위, 자운영, 취나물, 두릅순// 이런 봄들이 한 철/ 내 몸을 돌보고 지나가자/ 내 똥이 그만 소똥 같아져/ 뒷간 가는 일이 참 즐거워졌다.(시집표제의 <내몸의 봄> 시 전문)고 주전자 밥상을 두들기며 오도송을 일갈 내뱉었다. 한참 멍하니 듣다가 생각해보니 그의 생각이, 그의 게송이 옳고 깊은 것 같았다. 그의 짐받이에 주저없이 올라탄 그의 세간살이들은 이미 자신들의 오래되고 달은 몸뚱어리를 주인님이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의 애들과 그의 아내 또한 그의 자전거와 한몸이 되어 풀밭에서 같이 풀을 뜯는 것을 지상에서의 가장 큰 아름다움이라며 희망과 기쁨의 풀에 순종하고 있었다. 고맙다. 기쁘다.


나를 반성한다. 그의 시를 읽으며 나의 눈치에 대하여 반성한다. 늘 멀리서만 세상을 바라다보던, 그래야지만 넓게 보인다고 믿있던 나를 반성한다. 눈앞에서 눈치 코치껏 잘 바라다보면 더 소중한 것들이 많이 있고, 늘 보듬어주어야 할 것들이 이토록 많은데, 헛김 빠지게 나돌던 나를 반성한다. 아침에 걷다가 발에 채인 돌이나, 바지에 걸려 털려진 이슬을 지금껏 놔두고, 마당에 아이들과 물을 주며 발로 꾹꾹 눌러 자두나무 심으며, 작은 수고를 함께 보태고 기다리다보면 탐스런 자두가 열리는 그 아름다움을 다 팽개치고 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래, 그이 생각은 아름답다. 일상의 작은 것을 발견해내어 미적 가치로, 삶의 양식으로 환원시키는 그의 능력은 그의 자전거타기 솜씨 만큼이나 뛰어나다. 그런 그가 자전거를 타면 바로 달려올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참 자랑스럽다.
그리고, 그가 가끔 새로운 자전거 묘기를 하나씩 보여줄 때는 더 자랑스럽다. 그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멀리 가고 싶다. 그와 함께 달려가며 난 그가 나에게 암송해 주는 그의 시를 바람소리와 함께 가만히 들어 본다.

‘자전거’
- 처음으로 균형을 배우는 딸에게

얘야, 원래는
스스로 굴러간다는 뜻이긴 하지만
자전거는 결코 그 이름처럼
스스로 굴러가지 않는단다.

바람에 쓰러지지 않게
두 다리에 한껏 힘을 주고 언제나 저만치 앞을 보며
온몸으로 밀고 가는 것이란다.

가만히 서 있어도 아니되고 그렇다고
마구 내달리기만 해서도 안되는,
세상 살아가는 그런 이치를
이제 일곱 살인 네가 하마 알랴마는
호동그런 눈망울 가득 푸른 하늘을 담고
낑낑거리면서도 신바람이 난 네 뒤를 밀다가
세상 사는 일에 턱없이 뒤뚱거리기만 하는 애비는
쓸데없이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앞을 향해 열심히 내닫는 자전거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 법이란다

이건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다.

(류지남 시집 ‘내 몸의 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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