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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양신문
  • 승인 1990.08.23 00:00
  • 호수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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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흥한다는 운곡면 신대리를 찾아

도굴꾼들이 사리와 부도 등 유물들 가져가

지금은 흔적 찾기도 어려운 운곡사

<김>

 

운곡면 신대리는 밀교파로 4곡사중 한곳인 운곡사가 있었던 곳으로 새터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 말엽 청양군 북상면의 지역으로 새를 터를 잡아 마을이라고 새터 또는 신대리라 하였는데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배동, 오리동, 월라동, 점촌, 운곡동, 장대리, 신대리 일부와 북하면의 애라리 일부를 합하여 신대리라 하였다고 한다.

 

신대리는 1구(이장 윤주명, 46)와 2구(이장 강재구, 52)로 나누어져 있으며 맑은하늘 푸른산을 사이에 두고 그 유명한 구기자 농사를 지으며 150여 가구에 약 580여명이 살아가고 있다. 칼산끝에 조선시대 곡물대 여기관이었던 운곡장터가, 마을 지형이 달모양 같다하여 다래울(월라, 월곡)이 예전에 목화밭이였지만 지금은 논이 되어버린 화방들과, 운곡저수지 자리에 있었던 새터가 지금 1구에 있다.

 

2구에는 국사봉아래에 있는 마을생김새가 배의 모양 같다고하여 부르는 배미실(배곡, 주곡)과 사자미산 아래에 자리한 사자꼬리같이 생겼다는 사자미(사저미, 시재미), 물이 차며 맛이 좋아 속병에 효험이 있다는 신대리 찬샘(냉정골 찬샘), 옛날 유형도라는 사람이 마시고 장사가 되었다는 움나물골 샘물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신대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전에 운곡사라는 절이 있었던 운곡동이 있고 지금도 예전의 절터가 남아있는 신불암 석촌, 상새미, 상전골, 부도골등이 있다. 운곡동에 있었던 운곡사라는 절은 지금 담장을 쌓았던돌의 흔적만 남아있으며 이마을 주민 이재두(38)씨는 할아버지께서 어렸을적(약80여년전)부여 백제탑(정림사지 5층석탑)만한 석탑이 운곡사터에 있었으며 그곳에서 놀았고, 운곡사는 빈대 때문에 망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말했다. 또 이환일(49)씨는 지금부터 25년전 많은 토굴꾼들이와서 사리와 부도(돌로 깍은 탑으로 사리를 안치하여 절 근처에 세워두었던 것)를 가져갔으며 운곡사에서 흘러내려온 쌀드물이 운곡장터까지 흘러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신대리에는 매년 음력 10월2일에 석촌에 있는 산신당에서 산신제를 지낸후 마을입구에 장승이 있는 곳에서 노신제를 지내며, 일제시대때 생긴 금광(현재의 삼광광업소)에 광부만도1,500여명이 있었고 한달에 2번씩장도 크게 섰으며 집과 병원터의 흔적은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한적한 고갯길을 걸어나오면서 신대리는 세 번 흥한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며 운곡사 절로 합번, 일제때 광산으로 한번 흥했다. 하고 앞으로도 무엇으로 흥할지 모르겠다던 김기만(65)할아버님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나 또한 신대리의 남은 한번의 흥할거리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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