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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양신문
  • 승인 1990.10.18 00:00
  • 호수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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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면 화산리

행정구역상으로는 청양에 속하면서 찾아가려면 부여군 은산면을 거쳐야 가기가 편한곳, 장평면 화산리. 조선시대 말엽에는 정산군 관면의 지역으로 곶뫼(예전에는 꽃을 곶, 산을 뫼라 하였음) 또는 화산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화평리, 앵화리, 신기촌, 양지촌 일부를 합하여 청양군 장평면 화산리가 되었다.

 

곡창지대이면서 불교문화의 요람지였던 장평면, 그 중에서 전국제일의 중석광산이 있었고, 정혜사로 잘 알려진 화산리는 1구(이장 라윤찬)과 2구(이장 김덕권)로 나누어져 있으며 156가구에 683명이 살아가고 있다. 북동쪽에 있는 개골은 깊은 골짜기에 자리해 있어 나무가 많고 짐승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계곡이라고 부르다 개골이 되었으며 양지뜸 서쪽에는 고개가 장구의 모고가 같이 생겼다하여 부르는 장구맥이(장구목)이 있고 개골 남서쪽에 방갈미(밤갈미, 방가미)가 있으며 호랑이를 잡기 위하여 함정을 파놓았다 하여 부르는 함정고개가 있다.

 

또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정혜사가 고무래봉(정혜산)에 자리하고 있다. 정혜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 6교구이며 신라 문성왕 3년에 혜초국사가 창건하였다고하나 정확하지는 않고 마곡사 인명선사 및 서산대사의 8대손인 표충원장 송월선사가 중․창건하였다고 하며 1907년 의병들에게 밥해주었다하여 왜인들이 불을 질러 밤낮 16일이 탔다하며 1908년에 월파스님이 재건하였다고 한다.

 

큰절에는 오세창(고종때 사람, 33인중 1인, 서도가, 전예에 능함)이 쓴 ‘정혜사’라는 전자액이 있으며 산중턱에 있는 중암(혜림암)은 그 모양새만 보더라도 역사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얼마전까지 있었던 재래식 부엌 아궁이에는 큰일이 있었을 때 열다섯명이나 숨었다고 하며 법당에 모셔진 탱화는 100여년이 훨씬 넘은 것이라고 한다. 석굴암은 정상 가까이에 있으며 복원한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산신각이 유명하다. 그곳에 앉아 그아래 은산이며 부여, 백마강 기슭을 바라보면 사람사는 모습이 그렇게 잔잔해 보일수가 없다. 평온한 마음으로 참선하기에 아주 적절한 곳인 것 같다. 고무래봉 맞은편에 356m의 망월산이 있고 그안에 소바위가 있는데 예전에는 정월보름날 동네사람들이 달맞이를 하였다고 한다.

 

화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꾀꼴봉(앵화봉)에 있었던 텡그스텐광산(중석)이다. 1910년에 발견되었으며 가장 번성했던때는 지금부터 35~36년전 대명광산이 운영하였을 때라고 한다. 그때는 종업원수가 3천명이 넘었고 광화문 네거리 같이 거리에 사람들이 많았으며 저녁이면 간드레(카바이트를 연료로 한 등) 불빛이 대낮같이 밝았었다고 하지만 5년전에 폐광된 후로는 그 흔적만 어렴풋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앵화동 뒤로 개울이 흐르는데 거슬러 올라가면 넓은 바위가 있고 그곳에 앵화동천(鶯花洞天)이라는 네글자와 낙관같은 것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새긴 것이라고 전해져온다.

 

이밖에도 삼국사기에 백제 법왕떄 ‘크게 가물어서 왕이 칠악사에 가서 빌었다’라고 나오는데 칠악사가 화산에 있었다고 추측을 해서 그런지 절터는 몇군데 있었지만 칠악사지는 어느곳인지 알수가 없으며 지금도 이 마을에서는 심하게 가물면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 아직도 우렁이 살아있는 땅과 그 땅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화산리. 비록 부여군을 거쳐서 가야하지만 아끼고 보존하고 발굴해야할 귀중한 것들이 많은 우리 고장이며 거리가 멀다고 마음까지 멀게 느끼는 우리들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득 안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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