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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양신문
  • 승인 1990.11.29 00:00
  • 호수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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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생김이 용의 모양같은 화성면 용당리

고려시대떄 용곡부곡이 있었고, 조선시대때에는 용곡역이 있었으며, 조선시대때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의 묘와 그의 처 대구 서씨의 열녀문이 있는 화성면 용당리를 찾아가던 날은 여름장마 같은 비가 가을걷이 끝난 들판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조선시대 말엽에는 홍주군 화성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모산리와 원당리, 당촌, 옥계리, 용곡리의 일부를 합하여 용곡과 원당의 이름을 따서 용당리라 하고 청양군에 속하게 되었다. 원당, 용머리(용두), 아랫뜸, 윗뜸, 띠실(용곡) 등 5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1백 20가구에 4백여명이 살고 있는 용당리(이장 안효정․53). 어제 아버님 제사를 치뤘다는 새마을지도자(조종구․40)네집으로 날궂어 일못하는 마을 사람들이 굼시렁굼시렁 모여들고, 어제남은 술이며 떡, 국수가 그들앞에 차려지면 옛이야기가 오고간다.

 

마을생김새가 용의 모양 같다하여 이름도 용당(龍當)이라고 부르는 동네, 그 중에서 용의 머리부분을 예전에 신당이 있었다고 하여 당촌, 화성부곡이 있었다 하여 구화상, 용머리(용두)라고 부르며, 용의 허리부분은 용곡으로 용당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며 고려때 용곡부곡, 조선시대때 금정도 찰방에 딸린 용곡역, 조선말까지 면사무소 지서등이 있던 화성면 소재지였고 일제때까지 용곡장이 섰던 곳이다.

 

마을앞을 가로막고 있어 마을발전이 더디다는 주민들의 원망을 듣고있는 망산, 뾰죽하게 생겼다는 삐롱산, 서울과 전라도의 과거길로 말발굽이 떨어지지 않아 걸어서 지나갔다는 지금의 용두국교 자리의 당제, 마을뒤에 있는 고개로 상여가 넘어가지 못한다는, 그래서 마을이 생긴 이래 한번도 그곳으로 상여가 넘어가지 않았다는 뒷고개, 누구네 집터가 찰방 집터였다는 이야기,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3년이나 걸려서 만들었다는 주두순의 묘, 지대가 높아 물이 거꾸로 흐른다는 곳, 그래서 예전에 홍주군수가 홍주진골 막바지 모 다심었느냐는 말이 생기고, 홍성과 대천 사이 용당리가 가장 긴 고개였다고 하여 부르는 홍주진골, 무엇이든 하면 1등이라는 그래서 면민체육대회때도 늘 1등이고 더욱 이번 도민체전때 육상 금메달을 딴 김흥근씨도 용당리 사람이라고 자랑하는 조종혁(56), 조종혁(58), 윤덕렬(50), 유동석(47)외 여러 어르신네들의 이야기가 밖에선 비가 바쁘게 내려도 서두를 것 하나도 없이 느긋하게 오고간다.

 

또 경로당 건립, 공동답작으로 마을기금조성, 경로잔치, 효도관광, 불우이웃돕기, 노약자농가 농약살포 및 김매주기, 문패달아주기 등 마을의 발전을 위해 궂은일을 다 맡아 해 효행마을, 협동심이 강한 마을로 만들어 놓은 청년회, 78년 조직하여 10여년간의 활동내역을 기록해놓았다가 조목조목 설명하여 주던 새마을지도자 조종구씨외 여러 젊은이들, 다른 마을에 비해 많은 젊은이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어 어르신들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는 것까지도 효행마을의 몫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하루에 댓번 들어온다는 버스가 비가 와 빠질 것을 염려하여 저 아래 동네서 돌려가고, 화성에다 택시를 불러놓고 기다리는 동안 열심히 살아가는 그드르이 얘기를 곱씹고 있노라면 1시간 30분이 지나도록 택시가 오지 않아도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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