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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은 청양 - 원로 서예가 조병호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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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은 청양 - 원로 서예가 조병호 선생
  • 청양신문
  • 승인 1991.01.01 00:00
  • 호수 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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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제 숭상자이며 전통 학문 수호자

상고․근대사 줄줄이…청양사 훤해

추사체 맥 이은 마지막 선비

 

대전시 중구 정림동 52번지. 대전시라고는 하나 시골동네를 연상케하는 야트막한 야산밑에 선생의 집이 있다. 만덕문이란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단제 사당이 있고 왼쪽에는 안채와 서예와 한학을 가르치는 교실 관선제가 자리잡고 있다. 근세 조선시대로 접어든것처럼 건물의 양식이며 구조, 그리고 풍기는 멋스러운 고전의 향기가 선생님의 학문의 깊이처럼 은은히 울려 퍼진다. 추사체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마지막 선비요, 단제 숭상자요, 우리의 전통학문의 수호자이며, 고대사에서 근대사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심취되어 방대한 자료수집은 물론 그 증명을 위해 중국땅까지 다녀오신 역사학자이며, 대문장가이시며 당대에 볼 수 없는 명필가정향 조병호선생!

 

전향선생은 1914년 4월27일 정산면 덕성리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조부이신 조충현선생은 평양감사를 지내기도 하였는데 나라가 일제에 의해 식민지화 되자 조부는 종들을 해방시키고 문전옥답을 나누어 주었다. 종묘가 망한판에 상전이 무슨 소용이냐며 자신의 탕건을 벗어 버리고 멍석을 깔고 살았다고 한다. “조부께서는 저서를 40여종 남기실 정도로 문장가이기도 했습니다. 또 휘문학교에서 최남선, 민광식 등과 초대 교사를 역임하실 정도로 개화되신 분이었는데 일본놈 밑에서 손자를 공부시킬 수 없다며 당신이 직접 사서삼경을 가르치셨지요.”

 

정향선생은 그래서 조부로부터 3살 때 이미 한문공부를 시작했으며 네 살이 되자 서예를 여섯 살에는 작문공부를 하게되었다. 그러다 일곱 살때 조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민형식선생과 오세창선생 밑에서 한학과 서예를 익히게 되었다. 정향선생은 추사 김정희의 대를 이은 두분 밑에서 서법과 서도의 원리를 정통으로 전수받으며, 전서예서 등 각 서체를 익히기 30여년 한학과 글씨 공부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정향선생은 1939년과 1940년에 2번 일본과 중국 만주국이 공동으로 주최한 선전과 흥아전에 작품을 출품하여 입상하게 되는데, 그때 이미 동양권에서는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로 당대에 명성을 얻게된다.

 

그러나 정향선생은 글씨로 명성을 얻는 것이 싫었고 그래서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체의 전시회나 출품을 하지 않은채 지내왔으며, 해방후에도 국전에 출품을 한번도 하지 않게 된다. 조병호 선생! 세간에서 그를 가리켜 기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번 들으면 수십년이 지나도 잊어버리지 않는 천재성과(고대 근대사의 역사 줄줄이 외어)상고사에 심취되어 단제사상을 신봉하는 사상, 서예의 대가이면서도 출품이나 개인전을 전혀 하지 않는 등 평범한 사람들이 흉내내지 못하는 점들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단제 사상을 세우시고, 그리고 직접 추모문을 지어 단제를 기리는 비석을 세우시기도 했는데 단군과 단제는 어떻게 다릅니까? =우리가 단군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君’이란 호칭은 사대주의자들이 사용한데서 비롯됐는데 중국의 황제를 의식해 제를 군으로 격하시켰어요. ‘君’이라하면 광해군, 연산군등 강봉당한 왕을 말합니다.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군으로 쓰는 것은 참으로 한심합니다. 나라가 잘 되려면 우선 위정자나 국민들의 주체성이 확고 해야 돼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인 단제를 신화속의 인물로 전락시키고 있으니 이거 되겠어요? 정향선생은 단호하다. 중국의 순 임금이 우리나라 사람이었고, 한자가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중국황제의 시조가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이 모든 사실이 중국의 역사서인 ‘欽定滿洲源流考’ ‘史記’ ‘竹書紀年’ ‘古今記’등에 나와있다는 것이다. 

 

▲현 세태를 어떻게 보십니까? =요즈음 범죄와의 전쟁 선포니 하는 말이 있어요. 어떻게 부모가 자식을 상대로 전쟁을 한다고 합니까? 언제까지 하겠다는 것인지, 또 해보니까 잘돼요? 법을 시행하고 집행하는자가 모범을 보여야 해요. 그리고는 교정을 해야해요. 즉 가르치는 정치를 말예요. 자녀교육을 돈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양부모중 하나는 가정을 지켜야 하는데 요즈음 보면 내외가 다 돈벌러 나가요. 자식은 누가 돌봅니까? 모든 것을 돈으로만 해결하려 해요 

 

▲선생님 선비정신이란 무엇인가요? =선비정신은 곧 양반정신이예요 벼슬한 양반입니다. 그런데 벼슬한 양반들은 양반의 도리를 알아야 해요. 사람들로부터 욕을 안먹어야 양반인데, 요즈음 공직에 있는 사람들 부끄러운줄 알아야해. 옛날 군수 월급이 얼마인줄 알아요. 쌀 1가마였어요. 그것도 대두 5말이었어요. 그래서 군수 별명이 5두라고 불렀어요. 

 

▲최근에 중국에 다녀오셨는데 방문 목적은? =공식적으로는 한중 문화교류였는데 속셈으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자료(중국땅의 대부분이 우리영토)를 증명하고 싶었어요. 

 

▲그러면 현 중국의 어느지역이 우리땅인가요? =옛날 중국의 황제가 쓴 책이 있어요. 거기에 보면 길림성, 흑룡강성 뿐만아니라 내․외몽고, 시베리아까지 광할한 영토가 모두 우리 조선 땅이라고 표기되어 있어요. 지금 만리장성의 위치를 보면 잘 증명이 됩니다. 

 

▲개천절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단제께서는 백두산 출신이신데 구월산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시고 10월상당(10.3)에 생일날 즉위식을 가졌어요. 그날이 개천절인데 꼭 음력으로 헤야합니다. 그리고 음력 10월15일에 돌아가셨는데 그날이 어천절이예요. 

 

▲홍주의병사에 및나는 민종식 대장께서 일본군 원군에 의해 피신을 하였는데 그 부분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민종식 의병장은 훌륭한 분입니다. 판서의 자제로 부족함이 없었던 분인데, 전답을 팔아 군자금으로 써가며 싸우신분예요. 피신한 부분은 중요하지않아요. 그 부분은 그분 개인의 명예에 국한될 뿐 업적과는 상관없어요. 그때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면 더욱 유명해지는 그 차이일뿐이예요.

 

‘心正劃正’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글씨의 획이 바르지 않다’ 그래서 새벽마다 국조이신 단제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마음을 가다듬고 서예에 정진하고, 그리고 나아가 민족혼을 찾기 위해 70여성상! 73년 자유중국의 서법 학회로부터 당대에 볼 수 없는 명필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나 이같은 사실을 숨긴채 추사체 맥을 이어오는 마지막 선비로 족하면서 이제 후학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뿌리와 역사를 찾는 마무리 작업을 위해 마지막 정열을 쏟고 계시다. “뜻을 모르고 쓰는 글씨는 그림에 지나지 않아 학문을 이룬 다음에 붓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는 정향선생! 수제자 이며 손자이신 조득상씨는 말한다. “청양의 역사가 할아버님의 머릿속에 들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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