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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최고 - 청양읍 읍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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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최고 - 청양읍 읍내리
  • 청양신문
  • 승인 1991.01.31 00:00
  • 호수 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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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섬들과 우산성에서 비롯된 청양의 농경문화,

큰 강끼고 따뜻한 지형으로 큰 부락 있었던 것 추정

 

칠갑산과 상갑리에서 각각 시작된 내가 청양읍 읍내리 용배에서 만나는데 이곳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어을항천이며 이 냇물은 우산과 고리섬들을 끼고 금강하류인 부여 백마강으로 흐른다. 사학계에서 구로국이 있어서 삼한시대에 마한의 부락사회국가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읍내리는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농경사회로 변모, 철기시대로 넘어가면서 고고학쪽에서 보는 고리섬들 문화와 일반적으로 보는 우산성문화의 발생으로 청양문화가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계속 이어져 지금 청양의 모든 중심이 된 곳이다. 삼한시대떄에는 마한의 구로국으로 추정, 백제때에는 고랑부리현, 신라떄 청무현, 고려때 청양현, 조선시대말에는 청양군 읍내리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장대리, 안적동, 온천동의 일부를 합쳐 읍내리라 하였고 현재 1구(용배), 2구(빙곳재), 3구(아랫장터), 4구(신시장)로 나뉘어 1천5백31가구에 5천9백9명이 살아가고 있다.

 

청양의 농경문화 발생지를 고리섬들과 우산성으로 나누는데 먼저 고리섬들(환도, 고리도평)은 청양중학교앞 들을 말하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아주 옛날 지금의 십자로 남쪽으로는 모두 강이었으며 그 강가운데 고리같이 생긴 섬이 있어 그곳에 죄인들은 유배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해 물이 줄어 육지와 닿게 되었고 들로 변했다 하여 고리섬들이라고 하며 또 고랑부리현앞 들이되는 곳이라 하여 고랑부리들이 변하여 고리도평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 고리섬들 아래에는 조선시대 창고가 있었다하여 부르던 창들과 창터가 있었다고 한다. 우산은 큰강을 끼고 따뜻한 위치에 있어 족장이 있었던 큰 부락으로 추정되고 산성은 백제이전에 축성된 것으로 보며 성안에는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과 돌림병에 죽는 귀신을 위해 제를 지냈던 청양현여단과1년에 2번 제를 지냈던 청양현성황단이 있었다고 한다. 또 용의 머리를 닮은 바위에서 용이 승천하였다하여 용바위라고하고 그 마을을 용바위 용배라고 부르며 읍내 복판에 큰 절터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옮긴 청양석조삼존불입상(보물197호)과 읍내리 3층석탑(문화재자료 148호)이 봉안사(용암사)아래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권진(1357-1435 초선초기 명신)의 시에 나오는 쌍청루라는 누각이 지금의 읍사무소 뒤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밖에도 경찰서옆에 조선시대 청양군 감옥이었던 옥터가 있었으며 옛날 얼음창고(지금의 의료원자리)가 있었던 곳을 빙곳재라고 부르고 읍사무소 뒤에 있는 은행나무는 수령 5백20년된 것으로 그아래 큰 북이있어 고을에 불길한 일이 생기면 저절로 울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하며, 1919년 4월5일 1천명이 읍내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 농경문화가 요즘 쇠퇴하는 것 같아 안타깝지만 고리섬들과 우산을 끼고 흘렀던 물줄기가 청양의 역사를 이어왔듯이 지금 가만히 누워 고리섬들 바라보는 우산에 우리모두가 힘을 합쳐 쟁기를 걸어준다면 청양문화는 되살아 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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