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7 17:12 (수)
이달의 독립운동가 남강 이승훈선생
상태바
이달의 독립운동가 남강 이승훈선생
  • 청양신문
  • 승인 2001.03.05 00:00
  • 호수 4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864. 3. 25 ~ 1930. 5. 9)
(6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864. 3. 25 ~ 1930. 5. 9)

국가 보훈처에서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이승훈 선생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186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가난한 서민의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 향리의 서당에서 고작 3,4년의 한학을 배운 것이 학문의 전부였다. 하지만 근면과 성실한 성품을 바탕으로 상업계에 뛰어들어 입신한 인물이고, 독립운동의 거목이었다.
처음 유기상점의 사환으로 시작하여 보부상을 거쳐 유기공장을 설립함으로써 민족 기업가로 성장한 선생은 상사를 개설하고 무역과 운송업을 벌여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되었다. 그러던 중, 1902년 일본 영사과 소유 선박과 선생의 엽전 운반선이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과 그로 인한 연이은 사업의 실패는 생활상의 문제에서 반일 민족의식과 함께 민족의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는 게기가 되었다.
특히,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와의 만남은 일생 일대의 전기가 되었다. 그의 권유로 신민회에 참여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구국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동참하였기 때문이다. 이전까지의 인생이 개인의 영달을 위한 삶이었다면 이후의 인생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삶이었던 것이다.
신민회에 가담하여 평안북도 총감, 그리고 식산흥업 분야의 책임자로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자기회가, 태극서관 등을 설립하여 민족 자본 육성에 힘썼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향리인 정주에 강명의숙과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 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같은 왕성한 국권회복운동으로 일제의 요주의 인물이 되어 1911년 안악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얽어매 제주도에 유배되고, 이에 테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징역6년에 처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감옥 생활은 독립정신을 더욱 강고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출옥 후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민족교육 운동을 계속하면서 독립운동의 날을 기다렸고, 결국 그것은 거족적인 항일 독립운동인 3.1운동으로 표출되었다.
상해 신한청년당의 밀사가 도착하여 국제정세와 독립운동 논의를 알리면서 불붙기 시작한 기독교계의 3.1운동 추진을 주도한 것이다. 서울에 올라와 최린을 매개로 천도교와 연합을 이루어 3.1운동의 ‘일원화, 대중화, 비폭력화’ 원칙을 수립하고, 나아가 기독교계 민족대표의 선정에 이르기까지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3.1독립선언 직후 일제 경무총감부에 잡혀가서도 독립의지는 변치않았다. 일제 검사의 “금후에도 국권회복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 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어디까지든지 하려고 한다”고 당당하게 말했던 것이다.
때문에 민족대표 가운데 가장 늦게 출옥했지만 불요불굴의 독립정신은 살아 있었다. 그리하여 이후에도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민족교육운동에 매진하면서, 민립대학 설립운동·물산장려운동, 그리고 동아일보 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조국 광복의 날을 밝혔다.
그러던 중 1930년 5월 9일, “내 뼈는 표본으로 만들어 사랑하는 학생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한다”라고 하는 유언을 남기고 67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독립공원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3월 한 달간 전시할 예정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