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15:03 (금)
우리동네 최고
상태바
우리동네 최고
  • 청양신문
  • 승인 1991.10.03 00:00
  • 호수 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쪽에 들이있는 양지바른 곳 남양면 봉암리

우리동네 최고 - 남쪽에 들이있는 양지바른 곳 남양면 봉암리
 남쪽에 들이 있는 양지바른곳이라는 남양의 이름에 가장 어울릴듯한 마을 봉암리. 시내버스를 타고 밤나무골에서 내려 깨끗이 포장된 농로를 따라 산모퉁이를 돌면 거기 저녁햇살을 한껏 받아 금실금실 눈부신 들판과 저녁연기가 산허리를 두른 마을의 모습이 가슴에 와 안긴다. 조선시대 말엽에는 청양군 남하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개편때 비암리·조곡리와 신직리·초정리의 일부를 합하여 새티의 뜻과비암의 이름을 따서 봉암리라 부르게 되었다. 봉암리는 넓은 들과 은행나무제를 지내는 1구(이장:감용석)와 새티 조고실등 마을이름에서 아름다운 새소리가 들릴듯한 2구(이장:이창우)로 나뉘어져 115가구에 409명이 살고 있다. 우선 봉암리의 봉자가 시작된 2구는 구봉산 아래에 자리하고뒤에 큰 고개가 있으며 지행이 새의 모양같다 하여 부르는 새티(조곡)와 옛날에 고려장을 많이하였다는 고려장골, 절이있었다는 절골, 베골, 남대골, 도덕골, 참새골, 뾰족산 등이 있다. 또한 배암같이 길다랗게 생긴 산인 배암나리를 마주하고 있는 조고실(조개곡)은 계곡에 마을이 자리하여 온갖 새가 모여들어 새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는 유래와 예전에 조깃배가 월산을 통해 이곳에 들어왔다하여 조고실이라고 불렀다는 또다른 말이 2구에 전해져 오기도 한다. 정좌리를 지나 조고실을 거쳐 구봉으로 나가는 신작로가 전에는 군도였으나 지금은 농로로 변경되어 지금은 농로로 변경되어 이제야 겨우 농산물 유통이라는 명목으로 포장을 준비하고 있으며 지금 남아있는 사람보다 구봉광산 전성기때 돈벌이 떠난 사람과 땅을 지킬 수 없어 떠난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한편 1구는 다른 동리에 비해 고래실 같은 넓은 농토와 그 농토에서 멀리 떨어져 들을 내려다보는 농가의 모습으로 전형적인 옛 농촌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 으뜸되는 곳은 나래미(비암동)로 마을 지형이 나래(날개)처럼 생겼다는 유래가 있으며 지금의 마을앞 논을 뜻하고 있다. 또 예전에 숯을 구웠다는 공숫골 옆에 위치한 등지비는 언덕아래 평평한 땅위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이름이 붙었다. 봉암리 1구는 수령이 5백년된 은행나무와 마을풍물 도지정 문화재 방기옥시 가옥(기와집으로 예전에 아흔아홉칸이었다)이 알려져 있다. 봉암리 1구의 수호신인 은행나무는 수령이 5백년이나 되었으며 높이가 20m에 달하고 둘레 9m가 되는 거목으로 음력 정월7일에 은행나무제를 지낸다. 다른마을에서는 산신제나 기타 다른 제를 지낼때는 술을 쓰나 이마을 은행나무제에서는 감주를 쓴다. 예부터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는 은행나무제를 통해 지역적 연대의식을 다져온 봉암리, 그맥이 이어서인지 봉암리 주민들은 남녀노소 모두가 풍물을 칠줄안다. 우리것을 지키자는 의미에서 쇠4,징4,장구6,북7,소고등을 마련 꾸준히 연습해온덕분에 90년 청양군 농악경연대회에서 장려상을, 올해 남양국민학교에서 운동회중 마을별 농악경연대회에서 이 마을 어린이들이 1등을 했으며 올해도 군농악경연대회 남양면 대표로 나가기위해 낮동안 농사일의 피곤함도 잊고 60여명이 저녁 8시부터 11시까지 연습중이다. 구봉광산 전성기때 한밑천 잡아 더 잘살고 싶어하는 사람 서울로 보내고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진 사람들은 가슴에 묻고 우리땅 우리것 지켜보자며 비록 몸은 굳었지만 오늘밤도 풍물을 울리며 회관앞 마당을 펑펑뛰어 보는 봉암리 사람들. 그들은 농악대회 입상보다도 함께 어우러져 속풀이하는 이순간을 더 귀하게 여기리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