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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우리 민족예술의 대표인 농악’그 원류의 기능을 찾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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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우리 민족예술의 대표인 농악’그 원류의 기능을 찾자 !
  • 청양신문
  • 승인 2000.10.08 00:00
  • 호수 38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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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일 청양문화원장

농악은 우리 민속예술의 대표적인 예술로 보여진다.
농악놀이는 기풍과 당굿을 하는 정월부터 시작하여 7월에 호미씻기, 피땀흘린 보람을 담은 풍년가 등 1년내내 농악속에 서로간 협화를 이루면서 옛부터 전승되고 있는 우리 고유의 대표적 예술품이라 하겠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예술인 농악은 아득한 옛날 삼한시대부터 가락마치장단과 율동속에서 그 생동의 율동적인 타음은 협화와 협동을 바탕으로 전승되고 발전을 거듭해 왔음을 알수 있다.
삼한시대부터 시작한 농악은 본래 생산현장에서 율동적 타음으로 토착 신앙의 의식음악인 무악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장구한 역사속에 고유한 우리 농악은 어떻게 해서 농악의 본래 기능은 무엇인가 알아 보면서 우리 고장이 타악기의 합주는 소리를 가중케 하는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네개의 타음이 하나로 이루어져 더욱 생동감을 주며 협화와 평등속의 음악임을 알아 보기로 한다.
본래 한국농악이 원류를 보면 두렁쇠를 모체로 하고 있다.
이는 논두렁과 논두렁이 생산현장에서 율동과 타악으로 신명을 돋구는 사물놀이를 말한다.
난장쇠는 놀움마치들이 난장을 터서 놀때 흥을 돋구며 두둘기는 쇠, 그리고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고사와 덕담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걸립패들이 비나리쇠, 이밖에 뜬쇠는 완전 직업적인 농악잡이들로 구성된 눈요기 거리며 상업적인 농악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리고 농악이란 이름 자체가 농촌의 생산현장에서 생동감속에 피어났던 협동심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전통예술의 대표적인 농악은 삼한시대는 풍물이라 했고 삼국시대는 풍장, 고려시대는 매구, 오늘날의 농악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중기부터라고 전해온다.
이러했던 농악의 원류를 알아 봤을 때 기본악기로 꽹과리, 징, 북, 장고를 사물이라 한다.
이러한 우리민족의 고유한 민족예술이 대표적으로 전통을 이루고 있는 농악의 가락마치 장단을 보면 웃다리 농악을 비롯 좌도농악 우도농악 등으로 대표할 수 있는데 꽹과리가 기본을 때리는 맥박이라면 북은 심장의 고동과 같이 뛰고 여울지는 징소리는 내뿜는 호흡에 비유되고 있다.
따라서 장고와 꽹과리, 징, 북을 매만저 가며 도드락 거리면서 마침내 사물은 하나의 흐름을 이룩하는 것이여서 이가운데 하나만 빠져도 농악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알뜰한 농악의 발달사속에 우리 고장의 농악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유래되고 있는지, 또한 우리는 이와 같은 민속놀이를 통해서 선인들의 지혜를 추려내야 마땅하다고 본다. 그리고 농악 민속놀이 속에는 우리 선인들이 오랜 세월동안 꾸려온 생활과 멋, 모든 정신이 깃들어져 있고 깨뜨릴 수 없는 문화로 응고되어 있어 그 가치를 보존해야 한다고 본다.
농악은 또한 둔전병들이 군악으로도 사용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평야를 중심으로 발달한 경기농악과 그 속에서 유랑집단인 남사당패의 기예력이 합해진 웃다리농악, 노령산맥을 끼고 발달한 좌도농악, 그리고 넓은 호남의 들에서 생겨난 우도농악, 태백산맥의 맥을 따라 이룩한 영동영서의 농악, 이어서 천안의 흥타령 농악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농악들은 각기 그 지리적 조건에 적합하게 알맞은 진법이나 가락이 생겨 났다고 볼 때 우리 고장에서는 이중 웃다리 농악으로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오랜 역사의 흐름속에서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그 맥을 오늘날까지 이어져왔음을 더욱 긍지와 자랑으로 안고 있다.
우리는 가일층 이 민속예술의 대표격이라고 보아지는 아름답고 멋있는 농악을 본래의 원류를 다시 정성을 다하여 찾고 전승시켜 나가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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