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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메밀꽃이 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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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메밀꽃이 피면’
  • 청양신문
  • 승인 2000.09.24 00:00
  • 호수 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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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수 (시인. 청남면 왕진리 창고개)
이진수 (시인. 청남면 왕진리 창고개)

‘객주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지.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아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 가는 일색이었지…, 팔자에 있었나부지’
‘메밀꽃 필 무렵’을 읽은 기억 때문인지 메밀꽃을 보면 한낮에도 은근히 달빛이 느껴진다.
발자국 소리도 없이 찾아와서 사르륵사르륵 옷을 벗는 달빛의 뒷모습이 생각나고 수줍게 문을 여는 메밀꽃의 흰 얼굴도 떠오른다.
세상엔 참 하고 많은 연애가 있겠지만 메밀꽃과 달빛의 연애만큼 조용하고 여리고 순한 연애는 흔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안으로 깊숙한 곳으로부터 필요한 만큼의 관능과 생산성이 풍겨져 나오는 연애는 더욱 희귀할 것이다.
가벼운 한숨이 저절로 새어나오는, 이런 연애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고맙기까지 하다.
허생원처럼, 남은 삶을 혼자 살아도 무너지지 않도록 가슴을 지탱해 주는 그 한번의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행복하리라.
언제나 벌레먹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온갖 비바람을 견뎌 낼 수 있으리라.
요즘 나는 그 메밀꽃길을 따라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한다.
누가 심었는지 도로 가장자리가 온통 메밀꽃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아마 그분들의 가슴 안으로도 끝없이 메밀꽃길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그 길로 신나게 드라이브를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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