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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 기고 - 김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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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 기고 - 김영석
  • 청양신문
  • 승인 2000.07.23 00:00
  • 호수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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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석(57. 대전시 서구 가장동 세진기업(주) 근무. 비봉면 강정리 두산에서 출생. 가남초 10회·청양중 14회 졸업)
내 고향 열두가라미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김영석(57. 대전시 서구 가장동 세진기업(주) 근무. 비봉면 강정리 두산에서 출생. 가남초 10회·청양중 14회 졸업)

옛날 옛날, 아주 옛날에 내 고향 비봉의 땅에는 ‘가남들’이라고 하는 넓은 평야가 있었던 모양이다.
옛날엔 수리시설이 돼 있지 않고 농지정리가 돼 있지 않아 장마비가 내리면 온 가남들이 물에 잠기여 바다와 같은 수중으로 변해 버리기에 물빠진 바다를 연상하는 지명들이 지금도 많이 있다.
물이 빠진 다음 이곳 사람들은 갯벌에 곡식을 심었던 모양이나 이곳 가남들(평야)의 대부분이 천수답이였기에 파종적기에 하늘만 쳐다보고 비가 오기만 기다리며 살았던 것 같다.
이들은 비가 내리라고 하늘에 제사도 지내고 마을의 수호신이나 산신령 등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알 수 없는 미래의 불확실함에서 오는 공포나 스트레스를 풀려고 자연에 대한 애증을 간직한 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왔던 흔적들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자연을 이용할 수 있는 지혜가 좀더 있었더라면 지금보다도 더 살기가 좋았으련만 옛 선조님들의 이곳 생활은 그렇지를 못했던 것 같다.
산천이야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기에 변한 것이 별로 없다지만 그들이 사용하던 용수시설만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변해 가다가 어느 시점에서 대부분이 없어졌으나 아직 흔적이 남아 있는 곳도 많다.
이처럼 넓게 펴져있는 가남들은 무한천(無旱川)과 그의 지천(枝川)들이 종횡연합으로 만나면서 그 주변에 논밭이 생기고 마을이 생기면서 세월따라 가남들은 더욱 더 산간지대로 확장이 돼 갔다.
또한 가남들을 외워싸고 있는 산들도 많다.
비봉의 주산인 비봉산을 위시해서 바로 옆에 법공산과 장군봉이 좌우로 기립해 있고 연이어 은골산과 홍대산이 동북쪽으로 처져 있는가 하면 천태산과 소구니산이 서쪽방향을 막고 있다.
또한 법공산에서 내려오는 낮은 능선이 말미 뒷산에 이어지면서 가남들을 사방에서 폭 외워싸고 있다.
이러한 주변들의 산세에 따라, 화성면의 월산과 청라면의 오서산에서 발원된 무한천의 본류가 강촌냇가를 따라 가남들로 파고들면서 그 일부를 가남들로 밀어올렸다.
또한 청양읍 아리고개에서 발원된 무한천의 지류가 신원천과 문박천, 뜸티천과 관산천으로 이어지면서 인경동 앞에서 무한천의 본류인 강촌냇물과 합류된 뒤 큰 물줄기가 형성돼 대흥과 예산을 거쳐 그곳의 또다른 지천들과 합류되어 삽교천으로 흘러들었다가 서해로 빠져 버리는 것이 바로 무한천의 본류다.
무한천이란 ‘가뭄을 안타는 내’란 뜻을 지닌 시냇물로 사시사철 고르게 수원을 유지해 왔다고 전해진다.
옛날에는 이처럼 가남들을 둘러싼 주변의 산악지대와 거기에서 발원된 시냇물들이 제각기 지형을 달리하면서 길게 뻗은 무한천을 중심으로 중간지역에 큰 마을 12개가 생겨났다고 한다.
이곳의 주변사람들은 이 지역을 이름하여 ‘열두가람’ 또는 ‘열두가라미’라고 불러왔는데 지금부터 100년전만 해도 이곳 사람들은 원시적인 농업형태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자연이 황폐화되자 풍성하던 수자원도 활용치 못하고 유실시킴으로써 많은 전답들이 천수답으로 변해 빈번히 찾아드는 가뭄을 해결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하늘만 쳐다보며, 원망과 한숨으로 지새운 나날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한 역경을 겪고 또 겪어 오면서도 이곳 사람들은 수천년의 마을역사를 간직한 채 지금도 건재한 모습으로 살아오고들 있다.
그러는 사이 이곳 주민들은 인지(人智)가 발달하면서 점차로 자연을 이용한 농법을 찾아냈고 많은 노력과 인력을 동원해 무한천의 지천(가지천)을 중심으로 곳곳에 보(일명 뜸이라고도 함)를 만들어 놓고 흐르는 냇물을 가로막아 몇 키로씩 떨어져 있는 전답에 물을 대면서 어렵게스리 농사를 지어왔다.
이러한 보를 중심으로 또는 산이나 들녁에 형성된 마을을 중심으로 살다보니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마을의 이름을 보나 지형의 이름을 따서 불러왔다고 한다.
너른 황무지의 벌판인 가남들에 저절로 생겨난 자연부락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그 공동체의 마을 이름을 최초로 ‘가람’이라고 불러왔으며 그곳을 중심으로 지역여건상 마을마다 합동농업이 전개됐으나 언제부터인가 개인농업으로 경작을 하게 됐고 그것이 또다시 협동농업으로 전개됐던 모양이다.
그러한 합동마을의 이름인 ‘가람’이가 자신들도 모르게 생활양식의 변천에 따라 ‘가라미’로 변해버렸다.
이처럼 마을의 역사가 깊고 오래됐기에 마을이름 또한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변하게 됐고 마을의 통칭이름만 부르며 살다가 ‘가람들’의 이름을 아예 잊어 버리게 된 것이 아닐까?
부끄러운 일이지만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일용양식을 주고 있는 ‘가남들’을 까맣게 잊고 살아 온 것이다.
가남들녘에 산재해 있는 이들 열두가라미의 이름은 보(뜸)의 이름을 따서 부른 곳도 있고 그 마을의 위치나 형태 또는 모양을 보고 자연친화적 이름으로 지어 부른 곳도 있다.
무한천을 중심으로 지천냇가와 들녁에 형성됐던 열두가라미의 이름을 적어본다.
은골, 상록, 간쟁이, 만가대, 부르니, 홍지뜸, 샛뜸, 청양뜸, 인경동, 가찰미, 새재, 두산 등 그 이름들이 다양하다.
은골(隱谷)은 계곡 깊숙히 박혀 있는 마을이고, 상록(上綠)은 푸른 들판의 윗마을이고, 간쟁이는 논다랭이속의 들마을이고, 만가대(滿佳垈)는 수구막으로 둘러싸인 언덕위의 마을이고, 홍지(洪池)뜸은 주변에 너른 연못이 있는 마을이고, 청양뜸은 청양과의 마지막 경계에 위치한 마을이고, 샛뜸은 홍지뜸과 청양뜸의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인경동(仁鏡洞)은 무한천의 본류인 강촌냇물과 관산천이 만나는 경계에 위치한 마을이고, 가찰미는 홍수가 질 경우 물에 잠기어 마을 꼭대기만 가물가물하게 보인다는 마을이며, 새재는 높은 고개위에 있는 언덕마을이요, 두산(斗山)은 두뫼산골의 약자로 산중에 있는 두뫼마을임을 뜻한다고 하지만 그 진위는 알 길이 없다.
옛부터 내려온 이름들이니 그렇게 알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들 열두개의 마을들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리하고 있기에 이곳 주민들은 스스로가 자신들의 마을을 중심으로 합심하여 전답들을 경작하며 살아왔다.
또한 이들은 마을이나 농토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무한천 상류의 지천에다 봇물을 막아놓고 산수로(山水路)를 통해 물을 끌어와 논농사를 지어 왔기에 이곳 농촌의 생활은 매우 고달펐다고 한다.
산수로의 길이가 멀기 때문에 풍부했던 수자원의 유실로 큰비가 오지 않으면 항상 물부족으로 농번기엔 물싸움이 빈번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산간지역이 울창한 원시림으로 우거져 시냇물길이 깊고 맑았으나 언제부터인가 무분별한 산림의 남벌로 주변의 산들이 민둥산이 됐고, 산사태가 빈번해지자 물길은 서서히 낮아지고, 수면이 차츰 높아지면서 큰비가 내릴 적마다 물길이 뒤바뀌었다.
또 좋은 전답들이 휩쓸려 나가고 산사태가 일어나 토사가 넘치게 되고 천변의 유실이 심하게 되니, 어느듯 무한천의 물줄기는 서서히 지하로 스며들게 됐고 지천냇가에 견고히 쌓아놓은 보가 묻히고 유실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농수용 보(뜸)의 관리에 많은 신경을 기울이게 됐지만 점점더 황폐해지는 산들은 그리 쉽게 산림녹화가 되지 않아 악순환만 되풀이 됐다고 한다.
그후 지혜를 활용, 물을 막아 갇우어 쓰는 저수지가 만들어 졌는데 뜸티 저수지와 수적골 저수지 및 갈마골 저수지가 농사일에 큰 힘이 됐다고 한다.
그래도 오랜 가뭄이 지속되면 이곳 저수지들까지 말라 이곳 마을 전체가 흉년이 들어 초근목피로 연명을 해야했고 식솔들의 배고픔을 면키 위해 고리채에 의한 ‘선새경’이나 ‘쌀·보리 장례’가 유행했다고 한다.
연50%에서 1백%가 넘는 이자를 곡물로 내야했으므로 가난한 농가들은 이러한 농가고리채를 벗어나기가 매우 힘이 들었다.
그래서 남부여대해 고향을 남몰래 떠나거나 남의 집 하인이나 머슴 또는 마름노릇을 하면서 주인을 상전으로 모셔야 하는 사회적 상·하의 신분제도가 생겨났고 ‘부익부 빈익빈’의 새로운 사회가 형성되면서 하층민들은 수준이하의 천대를 받으면서 종속된 삶을 살아 왔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부유한 농가의 주인이나 이미 사회적 신분으로 인정받은 양반만이 권위가 있어 큰소리치며 그들의 경제적 부를 더 많이 축적하면서 공동체의 마을을 독선적으로 이끌어 왔다고 한다.
이처럼 시대의 변천에 따라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한번 잘못 들어선 신분의 고착화는 자신의 능력 유무를 불문하고 자자손손 그들 마을내의 공동체에서 오금을 펴지 못하고 살아왔던 게 사실이였던 것 같다.
옛날에는 들녁보다도 산수가 좋은 산간벽지에 큰 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산간지역으로 들어갈수록 수원이 좋아 많은 문전옥답들이 도사리며 풍요한 곡식을 생산해 주었고 저수지밑 수리답들 대부분이 이들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큰 저수지 밑의 수리답이나 큰 봇물이 있는 들녁은 어느 정도의 가뭄에도 벼, 보리농사를 그런대로 잘 지었으나 제일 아랫동네나 척박한 고지대의 산동네 또는 건수로를 끼고 사는 천수답의 마을들은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만 농사를 지어 식솔들을 먹여 살릴 수가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가뭄이 드느냐, 얼마나 비가 내려 주느냐에 따라 흉년이나 풍년을 점칠 수가 있었다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생수가 나는 물논이 풍년들고 비가 자주 내리면 생수나는 물논이 흉년들고 천수답이나 들녁의 너른 평야지대가 풍년이 들기 때문에 해마다 또는 마을마다 희비의 쌍곡선이 그려지기에 마을마다 특별한 부유층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살림살이는 그리 풍족스럽지를 못했던 것 같다.
이렇듯 흉년과 풍년이 번갈아 들면서 이곳 마을에 빈부의 격차를 줄여주기도 했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근면한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해서 처자식과 함께 잘 먹고 살고, 게으르고 주색잡기에 빠지는 사람들은 한평생 가난의 틀을 벗지 못하고 고생 고생하다가 한많은 일생을 마감한 사례들이 마을마다 늘 한두사람씩 있어 왔다고 한다.
어쨌든 옛날엔 하늘의 도움만이 농민들의 마음을 열어주었고 자연의 혜택만이 농민들을 살찌게 했던 시절이 많았던 것 같다.
이처럼 가남들녘은 수리답보다 하늘의 도움만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하는 천수답들이 많아 가뭄이 들 경우 큰 타격이 심했으며 그때마다 이곳 주민들의 충혈된 눈빛들이 무서웠다고 한다.
밤세워 물을 퍼내야 했고 누가 봇물에 손을 대거나 논물 또는 저수지 물을 남몰래 빼갈까 노심초사하며 밤잠을 지새우기 일수였으며 또한 저수지물이나 봇물을 놓고 윗동네, 아랫동네 사람들간의 사활이 걸린 물고싸움도 가끔씩 벌어졌으나 큰 사회적 물의까지는 빚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간혹 가다가 욱하는 감정싸움에 살인까지 일어났다는 얘기들이 곧잘 동네마을 정자나무 밑이나 유실수 그늘 아래의 놀이 쉼터에서 마을사람들의 입에서 귀로, 귀에서 다시 입으로 번져 발 없는 말이 백리를 달리 듯 발빠르게 전파되어 누구나 손쉽게 소문을 듣곤 했었다.
나쁜 소문이나 풍문일수록 더 잘 퍼져갔는데 예나 지금이나 남의 말은 아무런 여과장치나 거리낌없이 부풀리어 전파되기에 종국에 가서는 거짓말이 되는 수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풍문은 언제나 바람처럼 지나처 버린다고 했다.
이처럼 바람탄 소문만이 맴돌던 열두가리미에 대하여 어린 나는 이들 마을들이 얽히고 설켜 있는데다가 또한 한번도 가보질 못해서 어데가 또 어데인지를 잘 몰랐었다.
나는 내 고향 열두가라미가 대단히 넓은 지역으로만 알고 자랐는데 지금에 와서 자세히 알고보니 매우 좁은 지역임을 알게 돼 실소를 금할 길이 없게 됐다.
100년전의 생각과 그 실정을 안다면 그리 좁은 지역이 아님을 알 수 있겠지만 지금에 와서 오늘의 상황으로 내다 보니 좁은 지역인 것만은 사실이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인가가 없었고 도로가 뚫리지 않아 그야말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걷고 또 걸어가야 하는 산길이요, 들길이며, 물길 뿐이였기에 오늘날 생각되는 것처럼 그리 좁은 지역이 아님을 알 수가 있지만 왠지 실감이 가는 얘기는 아니다.
그래서 자주 옛선조님들의 속좁음을 생각하게 된다.
지금에 와서 고향마을의 크기를 생각해 보면, 옛날 내가 어렸을 적에 또는 초등학교에 다니거나 서당에 다닐 때에 학우나 학동들과 함께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놀던 바로 그곳이요, 나물케고 메뚜기 잡고 토끼풀을 뜯던 곳이며 고기잡이나 개구리수영을 배웠던 봇또랑이요, 썰매를 타거나 대보름날 쥐불놀이를 하며 뛰어놀던 들녁들이여서 거기가 거기이기에 이제사 열두가라미의 실체를 스스로 알게 됐다.
가남들녘을 둘러싼 이들 야산이나 봇또랑, 강촌냇가, 너른 들판, 외진골짜기들, 그 모두가 어린 내마음을 강하게도 만들었고 살찌게도 했으며 감성이 풍부한 문학소년의 꿈도 갖게 했고 큰 웅지(雄志)를 품은 정치가의 꿈을 갖게도 했지만 지천명(支天命)의 나이가 다 된 지금 어린시절의 낭만적 꿈이 하나의 망상(妄想)으로 끝나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자꾸만 솟아 나오는 느낌이여서 마음이 괴롭다.
언제나 꿈(이상)과 현실엔 차이가 있다지만 그 캡을 메우지 못하고 동떨어져 흩어질 때 그 인생은 실패했다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실패했다고 한들 지금에 와서 어떻할 것인가!
자신이 살아온 발자취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점철된 응어리들이라면, 실현되지 못한 꿈일지라도 자신의 삶 자체는 지고지순(至高至純)한 것으로 흠탄(欽歎)해야 돼지 않을까 !
어렸을 당시 우주의 공간만큼이나 넓고 크게만 느껴졌던 열두가라미의 옛모습이, 지금도 내 눈앞에는 아른아른하며 다가와 서지만, 많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점 그 모습들이 뒤바꿔지고 있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큰 줄기야 변한 것이 없다지만, 옛날처럼 흘러넘쳐야 할 봇물이 말라버렸고 무한천의 큰 물줄기가 끊어진지 오래됐다.
큰 저수지가 생기고 산밑으로 난 봇똘이 없어지고,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보 자체도 훼손됐으며 곳곳에서 지하수인 생수까지 뽑아올려 농사를 짓고 있기에 장마철의 큰비가 아니면 무한천의 물줄기는 미세할 뿐이다.
그렇게 풍부했던 지상의 물들이 어느사이에 모두 지하수로 스며들었고 많은 물들이 저수지에 담수돼 있으며, 관계수로가 잘돼 있어 옛날처럼 많은 물이 유실되지 않아 요사이의 가남들녘은 풍성한 곡식의 산실로 무럭무럭 크고 있다는 생각이든다.
옛날엔 벼곡식 반, 밭곡식 반이 이곳 들녘의 대체적인 전답의 비율이었으나 지금은 5분지4 정도가 수리답으로 문전옥답이 됐고 경지정리가 잘돼 있어 농사짓기도 수월하고 길거리가 사통팔달로 뚫려있어 넓게 퍼져있던 열두가라미도 이젠 다함께 이웃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집집마다 오토바이나 자가용까지 가지고 있어 왕래가 매우 편해졌고 통신시설의 발달로 사람들이 오가지 않고도 곧바로 일터에서 일터로 핸드폰에 의한 직접 의견교환이 가능하므로 서로가 근황을 잘 알면서 지내고 있다.
열두가라미의 주민 모두가 이웃사촌들처럼 정답게 지내며 살고 있으니, 농촌마을의 이웃사랑은 깊어지게 마련이다.
옛날에는 하루종일 걸어가도 만나기가 힘이 들었던 열두가라미의 사람들이 단 몇초만에 만나 대화를 주고 받는 등 시공(時空)을 초월한 세상에 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살기좋은 세상인가!
열두가리미의 앞날이 예측 가능한 현실로 다가선다.
과거는 현재의 아버지요, 현재는 미래의 아버지라 했던가!
과거를 회상하여 현재를 보고, 현재의 실상을 보고 미래를 예측함이 어렵지만은 않은 것 같다.
가남초등학교를 나온 나는 학교나이 60세가 넘어서야 비로서 학교이름의 유래를 알게 됐다.
옛날의 ‘가남들’이 유구한 역사의 변천에 따라 어느 사이에 ‘가람들’로 변해버렸고 그 ‘가람들’이 또다시 ‘가라미들’로 변해버린 시절에 태어났으므로 어린 나는 마을 이름의 통칭인 ‘가라미’만 알았지 그를 포용코 있는 ‘가남들’은 알지를 못했었다.
좁은 ‘가라미’의 한구석에서 살다가 보니 그를 포용하고 있는 ‘가남들’을 잊고 살았다.
무심코 산에 있는 소나무만 보았지 산속의 소나무 숲은 보지를 못한 어리석음을 이제사 알게 된 것이다.
그만큼 나에겐 언제나 전체를 내다보는 조감능력이 떨어지는가 보다.
이제 가남학교 교정에 서서, 바로 발치 아래에 펼쳐져 있는 ‘가남들’을 바라보고 있다.
소란형국(巢卵形局)의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가남초등학교의 둥지에서 6년간의 긴 교육과 수련생활을 통해 무식을 깨우친 이만오천여 동문들이, ‘가남들’의 풍부한 먹이를 먹고 자라나 위풍당당하게 우리사회 각계각층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현실을 바라 볼 때, 무르익어 가는 가남들녘의 오곡백과(五穀百果)와 녹음방초(碌陰芳草)들이 탐스럽게 피어오르는 산악지대의 모습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게 된다.
산마다 초목이 우거져 정글이 되고 푸른 들녘은 곡식들이 넘쳐나고 무한천의 상류를 막아놓은 저수지엔 물이 가득하고 지하수의 생수도 풍부하니, 가남들녘은 이제 아쉬운 것이 없어 보인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윤회처럼, 자연도 윤회가 있는 가 보다.
태교의 원시림속에 이곳은 모든 것들이 풍요롭고, 풍성하며, 자연의 순수함이 있었다는데 요즈음에 와서 보니 또다시 풍만을 구가하며 자연의 순수함을 되찾아 가고 있음이 조금씩 눈에 보인다.
자연에 순응하면서도 자연을 최대로 활용하며 살아왔던 옛선조들처럼, 내일의 후손들도 자연과 더불어 풍요속에 더 잘 살아 갈 것이다.
내 고향 열두가라미의 어제와 오늘을 내다보며, 지금보다도 더 밝고 풍요한 내일을 예측해 본다. 우리의 주변을 포용코 있는 넓디 넓은 가남들녘의 지평선이, 저 멀리 짙푸른 초록빛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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