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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7.10일자)나의주장-주류성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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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7.10일자)나의주장-주류성은 어디인가
  • 청양신문
  • 승인 2000.07.10 00:00
  • 호수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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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영 순(장평면 적곡리)
강 영 순(장평면 적곡리)
수 많은 역사학자들의 아전인수격 설전으로 백제부흥군의 최후격전지 주류성(周留城)이 아직도 정립되지 않아 70년간을 표류하고 있다.
제언자가 사가(史家)도 아니며 학자도 아닌 촌부로서 감히 제언하고자 함은 문화재는 한민족의 공동체적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정신적 가치관을 지닌 것이며 전인류가 공유하는 것으로서 문화재 관련 보호, 관리, 활용, 복원 등을 위한 법률을 제정하고 국민의 세금을 투자함은 물론 범국민적 교육을 실시하여 계승발전하는 것이라 본다.
문화재의 유를 논한다면-.
첫째, 대자연 자원적 문화재가 있을 것이고 둘째, 인위적 문화재가 있을 것이다.
이를 발굴, 복원, 보존, 관리, 활용함에 있어서는 인접 근린에 거주하는 주민의 고증이 참고돼야 할 것이고 다음으로 공직자들의 소임일 것이며 나아가 전문학자들의 노력으로 사기(史記)에 오를 것이다.
주류성 위치에 대하여 70년간 학자들사이에 설전이 계속되고 있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본인은 사실 설전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육·해·공 삼로전쟁이나 당시에는 육지전과 수상전이었으므로 이를 같이 정리해 나가면 정답은 빠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육지전은 불문율로 집어치우고 수상전만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①육지전은 삼국사기와 지리지에 명명백백 기록이 되어 있고 ②수상전은 삼국사기와 지리지 정비 50년후에 일본인 쓰다와 오다의 수상전과 연계하여 주류성 위치를 임의 설정하면서 국내학자들도 삼분오열로 제각각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80년전 와세다대 교수 쓰다(津田)가 수상전을 주목적하여 주류성을 연계한 목적은 백제군이 라당연합군에 의해 주류성이 포위되어 있음을 구해주고저 일본군 만명이 천척의 배로 백강(白江)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류성에 있던 백제부흥군을 도와주지못한채 백강(중국사기), 백촌강(일본서기) 등 백강구(白江口)에서 당군(당나라전함)에 의해 일시에 왜전 4백여척이 격침되었다는 것이나, 사실상 주류성에 있는 백제부흥군을 돕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육지전(주류성) 전투와는 관련하지 않고 수상전(백강)만을 목적한 나머지 쓰다 교수의 설이 백강은 금강하류이며 한산의 건지산성을 주류성이라 주장하였고 이를 동경제대 교수 池內廣이 동조하였고 국내사학의 대가인 이모씨 또한 동조해 국정교과서에 정설로 등재되어 있다 한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쓰다의 한산설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서천군의 각종 조사보고서에서 밝혀졌다고 한다).
쓰다의 한산설 이후 10년후인 조선총독부 편사관 오다라는 사람이 쓰다의 한산설을 뒤엎고 “전북부안에 있는 동진강이 백강이라고 볼 수 있어 위금바위성이 주류성이다”라고 주장함을 경성제대 이마이씨가 동조하면서 국내지리학자 노모씨, 역사학자 전모씨 등은 오다의 설이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육지전과 연계할 경우 이 또한 일고의 가치가 없는 주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육지전에서 라당연합 7만대군이 웅진에 이르러 정산 두루니성을 함락하고 이어 주류성에 포위돼 있는 백제부흥군을 지원할 목적이었다면 ‘일사지삼십리(하루 행군거리) 원칙’으로 볼때 얼토당토않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80년전의 쓰다설과 70년전 오다설로 인하여 국내 권위있는 일부사학자들이 양분되면서 연기설, 서산설, 홍성설등이 등장하면서 날이 갈수록 혼미만을 거듭하는 느낌이다.
결론적으로 본인은 ①쓰다설(한산 건지산성)은 허구임이 입증되었다 볼 수 있고 ②오다설(부안 위금바위성)은 일사지삼십리 원칙에 배치되는 것이며 기타설은 육지전을 간과한 느낌으로 이또한 불가주장으로 본다.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육지전을 중심으로하여 주장해 줬으면 하는 것이다.
쓰다와 오다설을 곰곰히 생각한다면 일제의 내선일체를 합리화 하기 위한 식민지사관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그 이유는 일본시기에 기록된 내용이 백제부흥군을 돕기위해 원군을 파견했다는 내용이 주요 기록이고 수상전중심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설은 설일 뿐, 사기는 아닌 것인만큼 사기를 앞두고 설전 70년은 종식하고 2000년에는 사기가 정립돼야 할 것이다.
깨알같은 잔글자로 수십쪽에서 수백쪽 분량의 설은 정의를 찾기 위한 것이라 한다면 당연히 사기에 나와 있는 육지전이 토대가 돼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인이 주장하는 바는-.
육지전- ①라당연합군 7만대군이 백제부흥근 공격을 위하여 공주 곰나루에 집결하여 정산 두루니성을 공격하였고 ②배후에 있는 칠갑산 큰성(일명;자비성, 두율성, 두솔성) 즉 주류성을 공격하여 백제부흥군 2천명이 전사하자 그피가 계곡으로 유수하여 적곡리라는 지명이 된 것이다.
수상전-백강이라 하였다.
백강은 부여 백마강이 분명한 것이라 본다.
필자는 육두문자식으로 위와 같음을 간단하게 주장하고 있으나, 차후 기회가 닿는대로 국립도서관을 통해 사료가 수집되는대로 이를 뒤받침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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